noonchinae
SeMA Storage, 684 Tongil-ro, Eunpyeong-gu, Seoul
2021.6.3 - 6.27
부재의 애호
/장지한
전보배의 개인전 <눈치네>는 누군가의 작품에서 출발하지만 이는 이미지의 차용을 위한 형식적인 선택이 아니다. 어느 이유에서 작가의 눈길을 끌었던 그 작품이 김범의 <눈치>였음을 생각해보면 이미지를 빌려올 장소가 필요했다고 말할 수 없다. 김범이 2010년 발표한 작은 책 <눈치>에는 빌려줄 이미지가 많지 않다. ‘눈치’라는 이름의 개를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그 책에 정작 눈치의 이미지는 없으며, 눈치의 형상을 대신하는 것은 주인이 될 수 있을 독자에게 그 개를 소개하는 문장이지만 그 언어마저도 대상을 충실하게 소묘하는 데 쓰이지 않는다.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고 대상의 습성을 열거하며 대상의 흔적을 좇지만 대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상을 둘러싼 언어는 그것의 얼굴이 되지 않으며, 언어는 눈치가 아니라 눈치를 둘러싼 영역의 경계를 그려낼 뿐이다. 미학적인 공간이 대상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존재하는 차원의 경계가 될 때 대상은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또는 부재를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전보배는 개의 이름 ‘눈치’에 접미사 ‘네’를 붙여 전시의 공간을 눈치와 나머지 가족이 함께 거주하는 장소로 명명하지만 눈치는 보이지 않고, 보일 수 없으며 나머지 존재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작가는 SeMA 창고에 그 공동의 공간을 만들기 이전에 먼저 사진 속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겹쳐보았다. 김범의 <눈치>에서 유일하게 빌릴 수 있었을 이미지를(김범의 책에서 개를 돌보기 위해 주인이 준비해야 할 최소한의 것들로 제안했던 사물들) 조각으로 만들어 이를 공간에 배치하고 촬영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갖가지 상품으로 소비자를 매혹하기 위해 선택하는 이미지의 전술을 흉내 낸다. 이때 뼈 모양의 장난감과 같이 눈치를 위해 준비될 사물들은 어느 카탈로그에서 보았을 익숙한 공간에 마치 상품처럼 놓여진다. 눈치를 자신의 집에서 편안하게 만들어 줄 물건들, 즉 눈치가 아니라 눈치가 존재하는 경계를 지시하는 사물들이 사진 속에서 상품이 되는 순간은 이 공간에 현전하지 않지만 존재할 눈치 옆에 붙잡을 수 없지만 존재하는 다른 무엇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상품은 언제나 사용가치를 넘어서는 매혹의 힘을 품는다. 뻔한 이미지의 형식이 만들어내는 마법이 텅 빈 물질 주변의 공기를 바꾸는 순간은 생각해보면 눈치를 품는 사물의 아우라를 닮았다. 보이지 않는 개도, 보이지 않는 상품의 교환가치도 부재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눈치네’에 함께 거주한다.
물질은 존재하지만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아니 존재하지만 오직 부재를 통해서 존재하는 어느 장소가 작가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으로 보인다. 전보배의 또 다른 전시 <마츠모토 준의 사마귀>에서 동료 작가 신은지의 그림은, 개를 그렸지만 “애매모호한 공간”일 대상의 “턱 밑”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림은 “고정된 한 가지 시점”을 벗어나는 장소다. 여기서 익숙한 시점의 부재는 그저 다른 시점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전보배의 말을 빌리자면 “그냥” 그렇게 되는 , 즉 “걸치고 있는 것들”, 혹은 “확인 가능한 레이어”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냥’의 경로”를 그려낸다.[1] 이 부재는 회화의 표면 위에 그 대상이 떠오른 경위에 관해 말할 수 없으며, 이 부유하는 대상을 붓을 쥐어지고 그려내는 작가마저도 왜 그것이 캔버스 위에 존재하는지에 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오직 “그림이 종료될 때까지의 여정만 존재할 뿐”인 그림,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떠오르는 그런 장소는 눈치와 상품처럼 어떤 부재 속에서 대상의 존재를 확인할 뿐이다.[2]
이 부재하는 존재는, 또는 존재 속의 부재는 전보배에게 매혹과 호기심의 대상처럼 보인다. 그가 이 존재를 “사랑해 줄 방법은 미술 안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때, 이는 부재와 부재를,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그 속에 매혹을 보존하고 있는 것들을 겹치고 또 겹쳐보며 그가 매일 꿈에서 확인하는 그런 공간, 즉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는,” “아는 것들 사이로만 흐르는 것들”의 공간을 엮어내는 일이다.[3] 작가는 상품과 눈치의 부재를 맞대어 보고 신은지의 그림 옆에 어느 ‘박제사자 이야기’를 겹쳐본다. 그런데 우리는 전보배의 이 ‘애호’의 시간 사이에 질문의 시간이 끼어드는 것을 보게 된다. 부재와 부재가 겹쳐지는 장소에 자신의 부재마저 겹쳐볼 때 그의 호기심이 질문을 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의 눈은 “카메라 렌즈의 대용품처럼 쓰이고,” 그는 “신체를 기계처럼 쓰고 싶어한다.” 이는 전보배에게 “찰나의 순간에 대한 소유욕”을 의미한다.[4] 그렇다면 ‘눈치네’는, ‘마츠모토 준의 사마귀’는 대상의 소유를 끊임없이 욕망하게 하는 시대에, 그 욕망의 반대편에서 존재의 마법을 보존하는 일이 가능한지에 관한 물음일지도 모르겠다.
[1] 전보배, 『마츠모토 준의 사마귀』, 2019, 11-12쪽.
[2] 전보배, 『마츠모토 준의 사마귀』, 8쪽.
[3] 전보배, 『마츠모토 준의 사마귀』, 11쪽.
[4] 전보배, 『마츠모토 준의 사마귀』, 12쪽.